[2025. 10. 9._국제신문/이제명의 오션 드림] 안주경업(安住輕業), 바다를 잃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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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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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명의 오션 드림] 안주경업(安住輕業), 바다를 잃는 길

 

433년 전 임진왜란 초기의 한반도. 부산에 상륙해 파죽지세로 북상한 14만여 일본군의 무력 앞에 호남을 제외한 국토 대부분이 유린당했지만, 바다에서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왜란 발발 20여 일 만에 처음 치른 옥포해전부터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까지 23차례 연승을 거두며 단 한 번도 제해권을 잃은 적이 없었다. 일본을 압도하는 전략·전술과 함께 ‘조선형 군선’ 판옥선과 거북선의 활용이 그 정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의 주력 군선인 판옥선은 일본의 주력 군선 세키부네보다 기동력이 떨어지는 약점이 있었다. 하지만 포격에 수월한 판옥선의 장점을 살려 근대 해전 수준의 원거리 포격전을 구사하는 조선 수군의 전략에, 빠른 속도로 적함에 접근해 등선(登船) 백병전을 시도하려던 일본 수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임진왜란 해전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이유였다.

임진왜란 후 270여 년. 판옥선의 성취에 머물러 있던 조선 강화도 앞바다에 일본이 증기 추진 근대식 군함 ‘운요호’를 몰고 와 위협했다. 1876년 2월, 조선은 결국 부산과 인천, 원산 세 곳의 항구를 무조건 개항하는 불평등 조약에 서명했다. 노를 젓는 구시대 전함 판옥선이 근대 해전에는 무용지물임을 알고 대비책을 마련하고자 했던 이가 조선 궁궐에는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창설된 해군은 한 척의 군함도 보유하지 못했다. 장병과 국민 성금으로 미국의 해양대학교 실습선을 구입해서 개조한 것이 첫 군함이었고, 운요호 위세에 굴복한 지 74년 만에 비로소 근대식 군함을 보유하게 되었다. 뉴욕항에서 개최된 대한민국 1호 군함 명명식에 우리 인수단은 ‘백두산’함이라는 이름을 준비해 갔다.

6·25전쟁 다음 날인 6월 26일 자정 무렵 부산 앞바다에서 북한 무장병력 600명을 태운 1000t급 수송선을 발견한 백두산함은 1시간가량 근접 전투 끝에 적함을 격침시켰다. 6·25전쟁 첫 해전이자 해군 창설 이후 최초의 전투함 단독 승리로 기록되는 ‘대한해협 해전’이었다. 이 해전에서의 승리로 육지와 바다를 통해 남한의 전후방을 동시에 공격하려던 북한의 양동작전이 조기에 차단되고, 이는 전쟁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3년여의 전쟁 기간에 임시수도로서 유엔군 병력과 군수물자 보급을 담당한 부산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대한해협 해전의 결과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이렇게 지켜낸 부산은 전후 경제개발 시기에 수출입 전진기지로 발돋움하며, 부산항은 1990년대 이후 세계 5위권 컨테이너 항만이자 세계 2위 환적화물 처리 항만으로 성장했다. K-조선의 중심지인 울산과 거제를 잇는 조선산업 벨트는 1949년 탄생한 부산의 대한조선공사가 그 토대다. 그랬던 부산이 최근에는 쇠락 위험이 가장 큰 대도시로 거론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인구감소와 전략산업 부재는 도돌이표처럼 지적되는 단골 이슈이지만, 마땅한 대안도 없어 보이고 모두 걱정만 하고 있다.

다행히 최근 들어서는, 해양수산부 이전이나 북극항로 개척 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 항구로서의 중요성이 언론에 부쩍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물론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부산에서 부산의 이름으로 만들어가는 구체적인 성과가 너무 초라하다. 해양을 내세우는 전략도 없고, 해양과 연결 짓는 그림도, 연결 지으려는 노력과 의지도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불과 76년 전, 용도 폐기 수준의 미국 대학 실습선을 구매해 군함으로 사용해야만 했던 한국이, 세계 최강 국가 미국으로부터 조선산업 재건 협력을 요청받을 만큼 위상이 상승했다. 머지않아 북극항로도 열리고, 2050년에는 탄소배출 제로를 목표로 선박에 대한 각종 규제도 강화된다. 급변하는 세계와 예측 불가의 환경에 어떤 전략으로 대응할지 우려가 크다.

K-팝, K-조선과 같은 다양한 K-시리즈를 시작으로, 세계 10위 경제권 선진국가, 일본이나 독일과 어깨를 견주는 제조업 강자 등, 대한민국의 수식어가 참 많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우연히 얻어지는 우월적 지위는 기대하면서 도전은 회피하고 타협과 흥정으로 편하게 지내려는 위기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가진 것에 안주해 성공한 사례는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실패를 두려워 않는 도전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을 생존 전략이 된다. 쉬운 것, 편한 것, 위험하지 않은 것, ‘지금 당장’ 인기 있는 것들만 찾다가 경쟁에서 낙오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해전 승전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5일이다. 1980년부터 이날을 ‘부산시민의 날’로 제정하고 기념하고 있다. 수군에 대한 조정의 무관심과 간신들의 핍박을 이겨내고 바다를 제패하고 나라를 지켜낸 이순신 장군의 고뇌를 상상해 본다. 아울러 부산시민의 날을 맞이하면서 ‘이름만 거창한’ 해양수도가 아니라 바다를 경영하고 국가경쟁력의 디딤돌로 만들어 갈 부산의 행보와 대한민국의 전략이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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